[성서로 세상 읽기] 자연은 생태 영성의 교과서
우리가 매일 밟고 살아가는 흙 아래에는 온갖 생물들이 하나의 작은 우주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2005년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된 바로는 불모의 땅이든, 기름진 땅이든, 흙 1g에는 100만 종의 세균이 산다고 한다. 한 큰 술도 안 되는 흙에 세균이 100만 종이나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이들 생물들은 인간이 버린 오물, 썩어 가는 식물, 죽은 동물을 분해하여 흙을 만들고, 흙을 뒤섞고 폭신하게 하고 흙에 물과 공기를 유통하는 수많은 통로를 만들어 기름지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생산적이고도 역동적인 자연 환경을 만들어 준다. 이렇듯 땅속 생물들은 조화와 협력을 통해 지구 생태계에서 생명의 텃밭을 가꾸는데, 우리 인간은 죽음과 파괴의 묵정밭만 늘려나가고 있다. 성경의 지혜자는 자연 세계를 관찰하면서 깨달은 생태적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 30:24-28). 흙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작지만 지혜로운 네 생물(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을 찬양하는 지혜자가 흙 속 미생물들의 존재도 알고 있었더라면 그들에게서도 지혜를 배우라고 권면 하였을 터이다. 자신을 둘러싼 생명체들을 한낱 미물로 여기기보다는 지혜를 배울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지혜자의 생태적 시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다코타(Dakota)족 인디언의 인사말은 ‘미타쿠예 오야신’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혹은 ‘모두가 나의 친척이다’라는 뜻의 이 짧은 구절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태적 정신과 소박한 삶의 방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모든 인연에는 배움의 기회가 있다고 믿었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며, 그곳의 책들은 돌들과 나뭇잎들, 풀들, 시내들, 그리고 대지의 성난 태풍과 부드러운 축복을 공유하는 새들과 동물들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란 단지 자연 속에서 배우는 것뿐이며,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들녘에 이름없이 피어난 풀을 보시면서 인간의 작은 믿음을 질타하셨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 돌보아 주는 이 없는 듯 자라나는 풀이 지닌 강인한 생명력의 원천은 하나님의 돌봄이다. 하나님은 들에 핀 백합화만 돌보시지 않으신다. 그 옆에 난 들풀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대상이다. 주변에 들풀이 없다면 백합도 장미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정한 미추(美醜)의 기준이나 경중(輕重)의 잣대로 자연을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나 70~80년 후에 무덤으로 던져지는 인생의 운명은 길고 짧음의 차이일 뿐 이 땅에서 누릴 생명의 유한성에서는 일반이다. 한낱 미물도 생명적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 쇠비름, 쇠뜨기, 민들레, 명아주, 토끼풀, 망초, 냉이, 바랭이, 벼룩나물, 여뀌, 엉겅퀴 등. 오랜 옛날부터 가난한 서민들의 민간약재로 사용된 들풀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우리들의 의사요 선생이다. 들풀이 지닌 생명의 원천은 창조주의 돌봄 안에 놓여 있는 그 ‘자연스런’ 생명력에 있다. 그 자연스런 생명력은 하나님의 돌봄을 통해 유지되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믿음은 자연을 닮은 믿음이다. 이것이 풀 한 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생태영성적 교훈이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자연은 인간의 학교”라는 말을 남겼다. 물질적인 풍요함 속에서 정신적 공황을 경험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자연이라는 큰 학교를 멀리한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 읽기 자연 생태 생태적 영성 생태 영성 들풀도 하나님